유럽 여행 짐 싸기 (전기포트, 샤워기 필터, 도난 방지)

짐을 다 쌌는데 정작 현지에서 "이걸 왜 안 가져왔지?"가 되는 상황, 한 번쯤 겪어보셨을 겁니다. 저는 1년간 세계 여행을 하면서 현지에서 구하지 못해 불편했던 것들, 반대로 몰라서 챙기지 못해 피부와 머릿결이 망가졌던 것들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진짜 필요한 것과 굳이 안 챙겨도 되는 것을 정리했습니다.

세계 지도 위에 놓여진 여권과 카메라

전기포트, 무겁다고 빼셨나요?

접이식 전기포트(Foldable Electric Kettle)란 사용하지 않을 때 납작하게 접어서 보관할 수 있는 휴대용 포트를 말합니다. 요즘 나오는 제품들은 무게 300g대, 접었을 때 두께 5cm 내외라 캐리어 틈새에 끼워 넣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부피나 무게 걱정에 짐 목록에서 지워버리는 분들이 많은데, 제 경험상 이건 장기 여행에서 가장 아쉬웠던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북유럽에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위도가 높아 오후 세 시만 돼도 해가 지고,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루 종일 걷다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따뜻한 뭔가가 간절해지는데, 전기포트 하나가 그 상황을 정말 빠르게 해결해 줬습니다. 컵라면 하나,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날 하루의 피로를 얼마나 풀어주는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쿠바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쿠바는 인프라(Infrastructure), 즉 전기와 수도 같은 기반 시설이 불안정하기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편의점에서 뭔가를 사 먹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환경이라 전기포트가 없었다면 훨씬 더 고생했을 겁니다. 최근에는 언니와 스위스·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는데, 주방이 없는 호텔에서 아침마다 전기포트로 커피를 내려 마셨습니다. 조식 한 끼 값을 아낀 셈이기도 하고요. 전기포트를 빼고 싶다면, 대신 무엇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지를 먼저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샤워기 필터, 여행 끝나고 후회하기 전에

이건 제가 1년 세계 여행을 마친 뒤 가장 뼈저리게 느낀 부분입니다. 여행 중에 피부가 당기고 머릿결이 푸석해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나아지질 않는 거예요. 화장품을 바꿔보고, 트리트먼트를 추가로 구입해 발라봤지만 이미 손상된 건 쉽게 회복이 안 됐습니다.

원인은 석회수(Hard Water)였습니다. 석회수란 칼슘과 마그네슘 이온이 다량 포함된 물로,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흔하게 나옵니다. 이 물로 매일 샤워를 하면 피부 장벽이 무너지고 모발 큐티클(Cuticle), 즉 머리카락 표면의 보호층이 손상되어 머릿결이 거칠어집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경수(Hard Water)의 성분이 피부 자극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샤워기 필터(Shower Filter)란 샤워기 헤드에 연결해 물속의 염소, 중금속, 석회 성분을 걸러주는 장치입니다. 요즘은 여행용으로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컴팩트한 제품들이 나와 있어서 캐리어 공간도 거의 차지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경험 이후로 짧은 여행이라도 샤워기 필터를 반드시 챙깁니다. 한번 망가진 피부와 머릿결을 되돌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이 훨씬 더 크거든요.

필터 교체 시기는 색깔 변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면 교체 신호입니다. 제가 밀라노 숙소에서 필터를 열어봤더니 불과 며칠 만에 색이 바뀐 걸 직접 확인했습니다. 파리와 밀라노처럼 오래된 배관이 많은 도시일수록 그 차이가 더 두드러집니다.

도난 방지, 제일 신경 쓰이는데 제일 준비 안 하는 것

유럽 여행에서 소매치기를 걱정 안 하는 사람은 없는데, 막상 짐을 쌀 때는 가방 하나 달랑 챙기고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도난 방지 관련 아이템을 꽤 꼼꼼히 챙깁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한 번이라도 당해보면 여행 전체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RFID 차단 케이스(RFID Blocking Case)입니다. RFID란 무선 주파수를 이용해 비접촉 방식으로 정보를 읽어내는 기술로, 신용카드와 여권에 탑재된 IC칩이 이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문제는 이 신호를 특수 장비로 몇 미터 거리에서도 무단으로 읽어내는 스키밍(Skimming) 범죄가 유럽 대도시에서 실제로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카드를 케이스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이 위험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기차로 도시 이동을 할 때는 캐리어 고정이 중요합니다. 와이어 줄과 자물쇠를 이용해 캐리어를 기차 안 선반 지지대에 묶어두는 방식인데, 저도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할 때 이 방법을 썼습니다. 자전거 자물쇠처럼 두껍고 긴 제품을 굳이 챙길 필요 없이, 얇은 와이어 줄 하나로 충분합니다. 숙소에 연박을 할 때도 청소 인력이 들어오는 시간대에 캐리어를 잠가두는 게 좋습니다.

아래는 도난 방지를 위해 챙기면 좋은 아이템 목록입니다.

  1. RFID 차단 카드 케이스 — 신용카드 스키밍 범죄 예방용
  2. RFID 차단 여권 케이스 — 여권 IC칩 정보 무단 도용 방지
  3. 소매치기 방지 백팩 — 버클·크로스 지퍼 잠금 구조로 외부 접근 차단
  4. 와이어 줄 + 번호 자물쇠 — 기차·숙소에서 캐리어 고정용
  5. 문 잠금 보조 장치 — 카드 키 방식 숙소에서 실내 잠금 보완

혼자 여행하는 분들에게는 문 잠금 보조 장치를 특히 추천합니다. 카드 키로 열리는 방식의 숙소는 외부에서 잠금을 해제하는 게 비교적 쉬운 구조라 실내에서 추가로 걸어두면 심리적으로도 훨씬 편하게 잘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꼭 챙겨가야 할 것들, 현지에서는 못 삽니다

여행 준비를 하다 보면 "현지에서 사면 되지"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한국에서 당연하게 구하던 물건들이 없거나, 있더라도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싼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전 프랑스에서 귀마개를 구입했는데, 한국에서 편의점에서 천 원대에 살 수 있는 제품이 현지에서 다섯 배 가까운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여행용 전기포트나 샤워기 필터도 외국에 없는 건 아니지만, 현지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이라 여행자가 원하는 컴팩트한 사이즈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먹고 남은 과자를 밀봉하는 클립 하나도 마트를 몇 군데 돌아다녀야 겨우 찾을 수 있고, 찾더라도 작은 사이즈는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소분 용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샴푸, 트리트먼트, 비오킬 같은 스프레이 제품을 소분해서 가져가려면 용기 자체의 품질이 중요한데, 내용물이 새지 않고 여행 내내 버텨주는 용기를 현지에서 찾기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유럽·남미 여행 중 수하물 분실이나 내용물 누출 사고에 대한 주의사항은 한국공항공사 여행자 안내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짐이 많아지더라도 현지 조달이 어려운 물건들은 한국에서 챙겨가는 편이 결국 시간도, 돈도 아끼는 방법입니다. 반대로 옷이나 양말처럼 숙소 라디에이터에 말려서 다시 입을 수 있는 것들은 굳이 많이 챙길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 원칙 하나로 캐리어 공간을 꽤 효율적으로 쓰게 됐습니다.

유럽 여행 짐 싸기는 결국 "현지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먼저 챙기는 게 핵심입니다. 전기포트, 샤워기 필터, 도난 방지 장치처럼 한국에서 준비해야만 제대로 된 제품을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목록에 올려두고, 나머지를 채워가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다음 여행을 준비 중이라면, 짐을 줄이는 것보다 무엇을 남길지를 먼저 고민해보시길 권합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89ae0GxR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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