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발파라이소-구시가지-전경-많은-집들과-나무-바다

 칠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도 자연유산부터 문화유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 하나하나가 독특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특히 도시의 역사, 생태의 다양성, 고대 문명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들이 많다. 이번 글에서는 이 나라를 대표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발파라이소의 구시가지, 라캄파나 국립공원, 움베르스톤 고고학 유적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1.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발파라이소 구시가지

 칠레 중부 태평양 연안에 자리한 항구 도시 발파라이소(Valparaíso)는 독특한 도시 구조와 풍부한 역사적 가치로 잘 알려져 있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서쪽으로 약 120km 떨어져 있으며, 버스로 약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이 도시는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등재 기준은 단순히 오래된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19세기 남미 무역의 중심지로서 형성된 독창적인 도시 구조와 문화적 융합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발파라이소는 태평양을 통과하는 선박의 주요 기착지였다. 유럽과 아시아, 북미에서 온 무역 상인과 이민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다양한 건축 양식과 도시 인프라가 도입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도심 곳곳에 남아 있다. 언덕 지형을 따라 지어진 다채로운 색채의 주택들과 철제 발코니,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사용된 고풍스러운 엘리베이터(Ascensores)는 이곳만의 매력을 더한다. 나는 이 도시를 10월 초에 방문했다. 날씨가 온화하고, 걷기 좋은 시기였다. 발파라이소는 걷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첫날은 숙소가 위치한 세로 알레그레(Cerro Alegre)에서부터 시작해 세로 콘셉시온(Cerro Concepción) 언덕을 중심으로 구시가지를 걸었다. 거리에는 현지 예술가들이 직접 그린 벽화들이 가득했으며, 갤러리 겸 카페들이 즐비해 한 걸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파세오 유고(Paseo Yugoslavo) 전망대에서는 태평양과 항구, 구시가지의 건물들이 어우러진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마신 커피 한 잔은 지금도 여행 중 가장 여유로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둘째 날은 문화유산으로서 이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발파라이소 미술관(Palacio Baburizza)을 찾았다. 이곳은 1916년에 지어진 유럽식 저택으로, 현재는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크로아티아 출신 사업가 바부리차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 건물은 외관부터 내부까지 아르누보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19세기 유럽 회화와 칠레 미술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나는 미술 감상보다도 오히려 건물 자체를 더 감명 깊게 본 것 같다. 나무로 된 계단, 유리로 장식된 천장, 정원에서 바라본 시내 풍경은 예술 그 자체였다. 셋째 날에는 좀 더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시에서 운영하는 도보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투어 가이드는 유창한 영어로 발파라이소의 해상 무역사, 엘리베이터의 구조와 역할,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이후 도시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과거에 항구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저렴한 목조 건물들이 지금은 예술가와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인기 숙소와 갤러리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이는 도시가 변화하는 방식, 문화유산이 단순히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자산'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아센소르 콘셉시온(Ascensor Concepción)을 타고 언덕을 올랐을 때이다. 이 엘리베이터는 1883년에 설치되어 현재도 사용되고 있으며, 짧은 거리지만 역사적 의미가 크다. 철제 골조와 나무 바닥으로 구성된 탑승 칸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언덕 위로 오르자마자 펼쳐진 거리 풍경은 언덕 아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티스트의 작업실과 작은 책방, 현지 디자이너의 숍들이 모여 있는 이 지역은 문화 예술의 숨결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현지인들과 나눈 소통도 잊을 수 없다. 발파라이소에서는 거리 악사들이 연주를 하거나, 벽화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한 벽화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청년과 눈이 마주쳐 박수를 쳐줬더니, 나를 향해 웃으며 “Gracias!”라고 외치던 그 짧은 순간이 여행의 감동을 더해주었다. 또 시장에서는 생선가게 주인과 간단한 스페인어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그가 직접 추천해 준 세비체는 칠레 여행 중에 먹은 해산물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신선하고 맛있었다. 이 도시는 단순한 관광 도시가 아니다. 골목마다 이야기가 있고, 건물 하나에도 오랜 시간의 흔적이 스며 있다. 발파라이소 구시가지는 예술과 역사, 삶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남미에서 가장 독특한 도시 중 하나이며, 누구에게나 색다른 영감을 주는 장소이다. 칠레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발파라이소 구시가지를 절대 놓치지 말기를 추천한다.

2. 라캄파나 생태 탐방

 라캄파나 국립공원(Parque Nacional La Campana)은 산티아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985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적으로도 생태적 가치가 높은 국립공원 중 하나로 꼽힌다. 면적은 약 80㎢이며, 해발 1,880m의 라캄파나 산(Monte La Campana)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칠레 고유 식생과 다양한 생물종의 보고로, 희귀종인 칠레 야자수(Palma Chilena)의 최대 자생지로도 유명하다. 라캄파나는 찰스 다윈이 1834년 비글호 탐험 중 실제로 등반했던 곳이다. 그의 항해 일지에는 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데스와 태평양의 경관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윈이 감탄한 이 생태계는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따라서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생태교육, 치유, 탐방 활동 등 다양한 측면에서 활용되고 있다. 공원은 연중 개방된다. 트레킹, 관찰, 캠핑이 가능하되, 엄격한 환경보호 규정 아래 운영된다. 이곳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산티아고 알라메다 버스터미널에서 올무에(Olmué)까지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택시나 미리 예약한 차량을 이용해 공원 입구까지 이동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차를 이용해서 가는 방법이다. 이 경우엔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공원 입구까지는 택시로 갈아타야 해서 불편함이 있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상쾌한 공기와 주변의 야자수 군락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중급 트레일인 로스 페레스(Los Peumos) 코스를 선택했다. 이 코스는 왕복 약 3~4시간 소요되며, 숲과 바위지대, 작은 계곡을 지나게 된다. 코스 중간에 위치한 전망대에서는 멀리 태평양과 안데스산맥이 동시에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은 지금도 내 여행 앨범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한 장이다. 왕복 약 7~8시간이 소요되는 난도가 높은 트레일도 있다. 하지만 등반 전에 체력과 장비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경로는 가파르고, 중간중간 바위 구간이 많아 트레킹화가 필수이다. 물과 간식은 충분히 챙겨야 하며, 고도가 올라갈수록 햇볕이 강하니 자외선 차단제와 모자도 꼭 필요하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펼쳐진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멀리 안개에 덮인 태평양과 웅장한 안데스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상을 표시한 작은 표지석에는 다윈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만약 이곳을 오른다면 그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트레킹보다는 조용한 생태 관찰이 목적이라면, 공원 입구에 마련된 생태 교육 트레일을 참여하는 것이 좋다. 왕복 1시간 정도로 짧지만, 자연해설사와 함께 걷는 프로그램이 있어 라캄파나의 생물 다양성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해설사는 칠레 야자수의 서식 조건,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고사 현상, 그리고 멸종 위기 종 보호 정책까지 상세히 설명해 준다. 그 과정에서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들꽃, 땅 위를 기어가는 곤충 하나에도 시선이 머물게 되며, 자연을 더 섬세하게 바라보게 된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숲길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었다. 가까이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그 순간은 지금도 가장 평화로운 기억 중 하나이다. 라캄파나 국립공원은 인간의 손이 비교적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공원 측은 탐방로 외 지역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쓰레기 되가져가기, 지정 구역 외 캠핑 금지, 식물 채취 금지 등의 규칙을 철저히 적용하고 있다. 이는 단지 규제가 아니라 이 소중한 자연 유산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약속이기도 하다. 꼭 가봐야 할 주요 지점으로는 정상 외에도 야자수 보호구역, 로스 페레스 전망대, 그리고 생태교육센터가 있다. 특히 생태교육센터에서는 패널 전시와 영상 자료를 통해 지역의 기후, 지질, 생물 다양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 가족 단위 탐방객이나 청소년 교육에도 적합하다. 또한, 공원 입구 인근에는 로컬 식당과 작은 숙박시설도 있어 1박 2일 일정도 가능하다. 이곳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방식, 생태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는지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내가 이곳을 걷고 숨 쉬고 관찰하며 느낀 가장 큰 가치는, 자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이었다. 트레킹을 통해 도전과 성취를 경험하고, 숲속에서의 고요함을 통해 치유를 느끼며, 해설을 통해 배움을 얻는 과정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깊이 있는 여행이었다.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곳은 그 어떤 장소보다도 완벽한 쉼을 선사해 줄 것이다.

3. 고대 미라가 발견된 움베르스톤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움베르스톤(Humberstone)은 한때 이 나라의 핵심 산업이었던 초석(Saltpeter) 생산지였다. 2005년에는 인근의 산타 라우라(Santa Laura) 초석 공장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는 칠레 산업사와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고대 미라가 발견되며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초석은 칠레 경제의 중심에 있었다. 천연 질산염은 비료와 폭약 원료로 쓰이며 전 세계로 수출됐고, 움베르스톤은 그 중심 공장이었다. 당시 이곳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수천 명의 노동자가 생활하던 작은 도시였다. 학교, 병원, 극장, 교회까지 완비된 마을 구조였지만, 20세기 중반 인공 질산염이 개발되면서 천연 초석 산업은 빠르게 쇠퇴했다. 이에 따라 이 도시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움베르스톤 유적을 찾는다면 반드시 봐야 할 곳은 초석 공장 내부, 학교, 공연장, 병원 건물, 그리고 소규모 전시관이다. 이 전시관에서는 치나로로 문화, 산업화 시기 초석 생산 과정, 그리고 최근의 미라 발굴 결과까지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인근의 산타 라우라도 함께 둘러보면 훨씬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이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인근 도시인 이키케(Iquique)에서 차량을 렌트해서 이동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대중교통으로도 갈 수 있으며, 버스가 하루 여러 차례 운행된다. 단, 버스 하차 후 도보 이동 시간이 있어 일정 계획에 여유를 두는 것이 좋다. 나는 이키케에서 버스를 타고 약 90분을 달려 이 도시에 도착했다. 한낮의 사막 한가운데, 낡은 철제 기계들과 텅 빈 교실이 마치 시간에 멈춘 듯한 느낌을 줬다. 바람에 삐걱거리는 창문 소리, 먼지 쌓인 운동장, 녹슨 공장 설비는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초등학교 건물이었다. 교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분필과 칠판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공책도 일부 보존돼 있었다. 그다음 날엔 현지 해설사와 함께 가이드 투어를 진행했다. 그는 움베르스톤뿐 아니라 인근 산타 라우라 유적지까지 설명해 주며, 21세기 들어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미라들은 기원전 5,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치나로로(Cinchorro) 문화의 유물로, 이집트 미라보다도 앞선 시기이다. 대부분은 사막의 건조한 환경 덕분에 자연적으로 보존되었으며, 일부는 인위적으로 제작된 초기 인류 미라의 사례로 연구 가치가 크다. 실제 미라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나, 움베르스톤 내 전시관에서는 사진과 발굴 기록, 당시 사용된 도구 등을 통해 전체 내막을 살펴볼 수 있다. 산타 라우라 초석 공장은 움베르스톤보다 작지만 기계 구조가 더 잘 남아 있다. 증기 엔진, 초석 건조 설비, 철제 운반 레일 등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당시 산업 기술의 흔적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곳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지금도 내 여행 블로그에서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한 건물 안에서 발견한 '작업자 안전 수칙' 표지판은, 그 시절에도 노동자의 안전을 고민했던 흔적이 남아 있어 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마지막 날에는 현지 문화 재단이 주최한 야간 특별 투어에 참여했다. 해 질 무렵 시작된 이 투어는 조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진행돼, 과거 노동자들이 겪었을 고요함과 어둠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공연장에 앉아 별이 쏟아지는 사막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 이곳이 단순한 산업 유산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죽음, 기억이 응축된 장소임을 깊이 실감했다. 밤하늘 아래에서 이곳을 살펴보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참고로 움베르스톤은 사막 지역이므로 햇볕이 강하고 건조하다. 따라서 선크림, 물, 선글라스, 모자는 꼭 준비하는 것이 좋다. 유적지 내부는 햇볕을 피할 곳이 많지 않아, 가능한 한 이른 오전 또는 오후 늦게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 지역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19세기 산업화 시대를 견뎌낸 노동자들의 땀과, 그보다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던 고대인들의 흔적이 공존하는 장소이다. 칠레 북부를 여행한다면, 이 지역은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이다.

 칠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역사와 생태, 사람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칠레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일정에 이 장소들을 꼭 포함해 보기를 추천한다. 그 여정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사람과 자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깊은 감동을 줄 것이다.